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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소개

백자의 고장

관요의 설치와 운영

  • 신증동국여지승람
  • 신증동국여지승람

광주 일대에는 사옹원(司饔院)이 관리하는 관요(官窯)가 설치되어 조선 후기까지 왕실과 관청에 필요한 백자를 제작했다. 사옹원은 왕이나 궁중에 음식을 공급하던 일을 관장하는 관청이었으나, 백자 수요가 증가하면서 그 역할이 확대되어 왕실 및 관청용 그릇제작을 직접 주관하는 기관으로 정착하였다.

광주 가마는 관요가 설치되기 이전에도 민간에서 운영하는 민요(民窯)가 설치되어 운영되어왔다. 14세기 말에서 15세기 초 무렵 초월읍 쌍동리에서 분청사기가 제작되었고, 이후 15세기 초에 가마수는 크게 증가하여 번천리, 우산리 등지에 가마가 설치되어 질이 좋은 백자가 제작되었다. 반면 관요는 15세기 후반 처음 설치되어 일정한 체계에 따라 운영되었다. 한편 왕실용 자기의 제작을 감독하던 실무 책임자는 관요 설치 이전과 이후에 차이를 보이고 있다.

관요 설치 이전에는 전국 4곳에 왕실과 관청용 자기를 공납하던 상품자기소(上品磁器所)가 운영되었고, 조정에서는 내시를 전국의 도자소에 보내 자기제작을 관리·감독하였다. 이러한 체제는 관요 설치 후에도 일정기간 지속되다가, 1478~1486년을 전후하여 내시를 대신하여 사옹원의 일반관리가 그 역할을 대체한 것으로 보인다. 이때 관요의 실무를 감독하던 사옹원의 관리는 ‘번조관’이라고 불렀다.

상품자기소에 내려가 왕실용 자기제작을 감독하였던 내시와 달리, 관요 설치 이후 번조관은 왕실 및 관청용 자기제작의 관리·감독뿐 아니라, 화원의 인솔, 사기장 관리까지 맡는 등 그 역할이 확대되었다. 하지만 번조관의 전횡이 심하여 사기장들이 관요에서 이탈하는 원인이 되기도 하였다. 관요에서 생산하는 왕실과 관청용 백자는 사옹원 소속의 사기장 380명에 의해 제작되었고, 이들의 역할로 운영체계는 물론 백자의 질에서 빠른 발전을 거듭했다. 이때 동원된 사기장은 지방 제작지에서 중품 이상의 자기를 만들던 인원들로 충원된 것으로 추정된다.

백자를 만들기 위해서는 재료인 백토의 공급이 중요한 문제였는데, 관요가 설치된 광주에서는 질이 좋은 백토가 상당수 채취되어 공급되었다. 또한 백자 제작에 필요한 땔나무[燔木]의 조달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관요는 대략 10년 정도를 주기로 광주지역의 수목이 무성한 곳을 찾아 이전했다. 하지만 17세기 후반 숙종대부터 오랜 기근과 흉년으로 화전민(火田民)이 증가하고 이들이 광주에 유입되면서 땔나무의 조달이 점차 어려워졌다. 이에 1752년부터는 필요에 따라 관요를 수목이 무성한 곳으로 이설하던 이전의 운영체제에서 벗어나, 현재의 남종면 분원리에 관요를 고정시키고 강원도 등지에서 땔나무를 수로로 운반해 사용하는 형태로 변화되었다.

분원 가마터의 분포와 성격

  • 갑발 파편
  • 갑발 파편
  • 번천리 6호 백자 가마터
  • 양질백자(좌)와 조질백자
  • 중부면 번천리 9호 백자 가마터

시 관내에는 조선 전기부터 후기까지 조성된 분원의 가마터가 많이 남아있다. 퇴촌, 중부, 경안, 송정, 광남, 초월, 도척, 실촌, 남종 등의 지역에 고르게 분포한다. 다만 그동안 조사된 지표조사에서 밝혀진 결과에 따르면 시기별로 분포지역이나 가마의 이설, 가마수에 차이가 있다.

1915~1935년 조선총독부의 조사 이후 조사를 진행할수록 그 숫자는 67곳에서 312곳에 이르기까지 증가하였다. 이 중 현장에서 수습된 파편의 수량이 가장 많아 구체적인 내용의 확인과 검토가 가능한 「경기도광주중앙관요」에 따르면 모두 289곳에 가마터가 있는 것으로 보고되었다.

전체적으로 보면 퇴촌에 가장 많은 가마가 있고 그 뒤를 이어 초월, 실촌, 중부, 도척, 남종면 순이었다. 대표적인 지역으로 관음리 35곳, 무갑리, 신대리, 우산리, 번천리 등지에 각각 20여 곳이 발견되었다. 특히 퇴촌면, 초월읍, 실촌읍 등이 다른 지역에 비하여 가마의 설치와 운영이 활발했고, 제작도 활발했으며 가마의 이설이 적극적으로 진행되었다.

이처럼 광주지역에 많은 가마터가 산재한 주된 이유는 제작에 필요한 연료인 땔나무를 구하기 위해 숲이 울창한 지역을 찾아 이설했기 때문이다. 대략 10년을 주기로 이설했고, 18세기 중반 이후 분원리에 고정되었다.

한편 가마터의 분포와 함께 관심을 끄는 것이 입지이다. 가마는 낮은 구릉에 많이 설치되었는데, 대략 해발고도 30~365m 사이에 분포하고, 특히 50~185m 사이에 집중적으로 설치된 것으로 밝혀졌다.

관요는 일정한 시기에 하나의 가마가 운영된 것이 아니라, 몇 기가 동일한 사기소 번조관과 사기장들에 의해 함께 운영되었다. 대체로 갑발을 사용해 최상질 백자를 제작하던 갑기번조요(匣器燔造窯) 1~2곳과 포개구이로 다량의 그릇을 만들던 상기번조요(常器燔造窯) 6~7곳의 가마가 동시에 설치되어 운영되었고, 왕실용 혹은 관청용 등 용도에 따라 서로 다른 질로 구분되어 생산되었다.

시기별 분원 백자의 특징

  • 백자청호운룡문병
  • 백자청호운룡문병
  • 백자청화운룡문호편
  • 백자철화운룡문항아리
  • 철화백자편
  • 백자청화운룡문항아리
  • 청화백자편

관영 사기제조장인 광주분원이 15세기부터 20세기 초까지 많은 백자를 생산해왔다. 이곳에서 생산된 백자들은 시대별로 크기와 형태, 장식 등에 변화가 있었다. 조선 전기(15~16세기)와 중기(17~18세기), 후기(19세기)의 시기로 나눌 수 있다.

조선 전기 백자의 특징은 시기적으로 관요 설치 이전과 이후로 구분된다. 민요에서 제작되던 기종 및 각각의 크기나 세부의 특징은 관요의 조질(粗質)백자로 이어지기도 했고, 관요의 질 좋은 백자는 크기나 굽의 모양 등에서 이전의 민요 백자와 다른 특징을 보여주며 백자의 기종도 종류가 증가하고 관요에서 그 수가 더욱 많아졌다. 또한 동일 기종 내에서도 세부의 형태와 크기가 서로 다른 유물들이 다수 발견되며, 관요 설치 이후 왕실과 관청에서 백자의 용도가 분화되고 사용이 더욱 다양해졌다.

백자의 장식에서 나타난 특징으로 하나는 상감장식으로, 상감백자는 관요 설치 이전부터 제작되기 시작하여 청화장식의 요소가 새롭게 차용되면서 16세기 중반까지 지속적으로 만들어졌다. 다른 하나는 청화장식으로, 관요 설치 이후 본격적으로 화원의 그림이 장식되기 시작하여 16세기 말까지 계속되었고, 소재와 구성, 표현 방법 등이 화풍에 따라 변화하거나 새로워졌다.

조선 중기에는 백자의 품질이 다소 떨어져도 백자의 생산량을 증대시키기 위해 조질백자의 제작 기법과 함께 굽의 형태와 같은 기형에서도 변화를 보이고 있다.

주요 내용은 첫째, 전기 형식의 정형화는 전기양식에서 후기양식으로 이행하는 과도기적인 현상이 보인다는 점이다. 반상용기, 특히 발과 잔의 몸통이 높아지면서 배가 불러 곡선이 과장되고 내저원각(內底圓刻)의 지름이 굽지름보다 현저히 작아지는 점, 굽의 외측면이 살짝 안으로 경사지는 점, 전접시의 안바닥이 곡면을 이루면서 오목해지고 항아리 굽의 안팎이 곡면화되는 경향이다. 둘째, 17세기 중반 등장한 신형식에서 백자의 기형은 발·잔·접시 모두 공통적으로 내저원각이 없으며 굽이 매우 낮고 입술이 벌어지지 않았다는 점이다. 셋째, 17세기 말에서 18세기 초에 등장한 신형식에서는 중국도자의 영향을 받았다는 것이다. 양감이 크고 굽이 넓은 항아리와 병, 특히 몸체의 외면을 팔각 등 다각으로 면취한 특징을 보이고 있다.

조선 후기의 경제적 성장은 문화와 산업 전반을 융성시키는 계기를 마련했다. 분원의 운영에서도 분원의 고정과 조세제도 정비를 통해 인력과 원료의 수급에 안정을 이룰 수 있었다. 이처럼 국가경제가 성장하고 분원이 안정됨에 따라 후기 백자의 생산이 증가하고 청화로 장식하고 감발을 상요하여 번조한 고급백자가 널리 유행했다.

특히 주목되는 것은 18세기에 들어서면서 청화백자가 보다 활발히 제작되었다는 점이다. 이때 유행했던 문양으로는 각종 문자와 국화, 매화, 대나무, 난초, 모란, 연화, 운룡, 산수, 장생문, 박쥐, 나비, 물고기, 당초문 등이었다. 그런데 운룡이나 매화, 대나무 같이 전기부터 왕실 의례용으로 꾸준히 묘사되던 문양과 함께 산수, 사군자와 같이 문인 사대부들의 취향을 반영하거나 ‘수복강령(壽福康寧)’의 문자나 장생, 모란, 물고기 등의 길상(吉祥)적 성격을 띤 문양이 공존하고 있다는 점이 눈길을 끈다.

한편 후기 분원백자의 커다란 특징 가운데 하나는 청나라 백자양식의 유행이라고 할 수 있다. 두 차례 호란 이후 불편했던 대청관계가 우호관계로 돌아서고, 18세기 후반~19세기에는 성리학을 대체하는 새로운 북학사상이 대두되면서 대외무역을 통해 많은 양의 중국·일본 도자기가 조선에 유입되었다.

중국 도자기와 새로운 문물의 유입은 분원백자의 양식에 적지 않은 영향을 주었다. 특히 18~19세기에 유행한 길상문은 청의 양식을 그대로 수용하기보다는 주체적으로 재해석하는 과정을 거쳐 문양을 부분적으로 차용하거나 민화풍으로 표현한 것이 특징이다.

또한 중국의 다채색 백자의 영향을 수용하여, 분원백자의 일각에서는 청화와 철화·진사를 동시에 화려하게 장식하거나 양각, 투각 기법을 사용하여 기묘한 형태로 만든 고급품 항아리와 병, 화로, 화분, 문방구 등이 많이 제작되었다.

백자의 전통을 잇는 사람들

  • 고려도요
  • 고려도요
  • 이천 신두문 수광리 칠기가마
  • 도자 장인 황종구
  • 청자선문병
  • 도자 장인 한일상
  • 백자청화난초문호
  • 광주왕실도자 초대 명장 박부원
  • 백자달항아리
  • 광주왕실도자기 2대 명장 이광
  • 백자호
  • 도자 장인 김완배
  • 백자청화화접문접시

광주분원은 1884년(고종 21) 관영체제에서 벗어나 민영화의 길을 걷게 된다. 조선 왕실의 수입자기 사용 증대와 분원장인에 의한 사번이 증가했기 때문이었다. 민영화 이후 분원은 일본인 제작자들에 의해 선진기술을 도입하여 제작기술의 향상을 시도하기도 하였으나 실패하고, 어느 정도 명맥만 유지하다가 1930년대 들어 결국 사라졌다.

한편 대한제국은 1908년 전통공예의 전수 및 복원과 황실용 공예품 조달을 목적으로 ‘이왕직미술품 제작소’를 설립하였다. 이 제작소는 이후 30여 년 간 명맥을 유지했지만, 상업적인 경향이 강해지고 상품제작을 위한 모방과 답습 등에다 경영난에 봉착하여 폐쇄되었다.

전통공예 발전을 위한 노력은 해방 이후 본격화되었다. 1955년 조선백자의 전통을 계승하려는 목적으로 ‘한국조형문화연구소(성북동가마)’가 설립되고, 1956년에는 ‘한국미술품연구소(대방동가마)’가 조직되어 고려청자의 재현을 목적으로 활동하였다. 하지만 너무 이른 시기에 설립되어 사회적 공감대를 형성하지 못하고 폐쇄되었다.

한편 광주에서도 1960년대에 민속도자기연구소의 활동을 시작으로, 1970년대 중후반에는 박부원(도원요), 최근식(분원요), 이후락(도평요), 김영수(경안요), 구성회(미도요), 이광(백담도요), 김기철(보원도요), 한일상, 윤광조 등이 요장을 설립했다.

이후 1980년대에는 양명환이 1983년에 청진요를 설립하고 지금까지 고려청자 전통을 계승하고 있으며, 1985년에는 류선영이 완송요를 설립하고 조선백자 전통 계승과 발전에 힘쓰고 있다. 이외에도 신현철(신현철도예연구소), 이윤희(죽전도예), 박상진(개천요), 조민호(단원요) 등이 요장을 설립하여 활발한 제작활동을 하였다.

이런 과정을 거쳐 광주지역에서의 전통 도자제작 활동은 비약적으로 발전하였다. 2006년 광주지역 전체 요장수는 71곳, 광주왕실도예사업협동조합 가입요장은 57곳에 달한다. 이 중 34곳을 조사·분석한 결과, 절반 이상이 1990년대 이후 설립되었으며, 대부분 분청사기와 백자를 제작하고 있다. 도척면 6곳, 초월읍 12곳, 실촌읍 11곳, 남종면 2곳, 중부면, 퇴촌면, 쌍령동이 각각 1곳으로 나타났다. 조선시대 당시 양질의 백자를 생산하던 퇴촌면 일대의 요장수는 적은 반면 3번 국도변에 위치한 초월읍과 실촌읍에 많은 것으로 보아, 교통이 편리한 곳에 요장이 집중되었음을 알 수 있다.

1980~1990년대에 요장수의 증가와 도자제작자들의 활동으로 지역 및 한국도자 발전을 위한 조합이 결성되고, 협회가 발족하는 등 발전을 거듭하고 있다. 1987년 광주·이천 도예가들이 중심이 되어 도자기축제가 개최된 이래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 한편 2001년부터 시작된 세계도자비엔날레는 광주·이천·여주 등 3곳에서 동시에 개최되는 국제 도자기 축제이다. 각 지역에서 생산되고 있는 도자기는 특성과 환경에 따라 다른 형태로 나타나는데, 광주 왕실도자기, 여주 생활도자기, 이천 작품도자기 등이다.

담당자 연락처
  • 문화관광과 031-760-4822
최종 수정일
2025-12-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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